2018년 한지라이프에서는 작년에 이은 의미있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.
한글박물관의 소장유물 <정조어필 한글편지첩><말모이> <첩해신어 2권> 총 4권의 영인본을
직접 넘겨보며 볼 수 있는 열람용으로 제작하였습니다. 한글박물관 도서관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.
정조어필한글편지첩
『정조어필한글편지첩』은 정조(正祖)가 큰외숙모인 여흥 민씨(홍낙인(洪樂仁, 1729~1777)의 처)에게 보낸 편지 등을 모아 만든 어필첩(御筆牒)이다.
이 어필첩은 정조가 4~5세였을 때부터 1798년(정조 22)까지 작성한 글씨 2점과 세손 시절에 쓴 편지 6점 및 재위 기간 쓴 편지 8점, 총 16점이 모아져 있는 한글 자료이다. 편지의 내용은 대개 큰외숙모 여흥 민씨에게 음식 등의 물건을 보내거나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. 특히 재위 시절에 쓴 편지 가운데 12월 편지 4점에는 새해 선물에 해당하는 물목 단자가 딸려 있다.
조선 시대의 한글 편지 가운데 어린이의 필체로 쓴 편지가 드물고 또 연령대에 따라 한글 필체의 변화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. 더구나 편지를 쓴 필자가 조선의 왕 정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. 또한 18세기 국어의 특성을 보여주는 국어사 자료로 표기나 음운, 문법, 어휘 면에서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헌 자료에서 나타나는 특성과 비교해 볼 만한 한글 자료이다.
말모이
『말모이』 원고는 표제항 ‘ㄱ’부터 ‘걀죽’까지 수록된 출간되지 않은 채 원고 상태로 남아 전해지는 필사본 한국어 단일어 사전의 일부이다.
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(1876~1914)과 그의 제자 김두봉(1889~1960?), 이규영(1890~1920), 권덕규(1891~1950) 등이 1911년~1913년 사이에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하여 1916년 무렵 사전 원고가 마무리되었으나 주시경의 사망과 1919년 김두봉의 상하이 망명 등으로 출판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.
이 필사본 사전의 원고 표지 제목은 ‘ㅁㅏㄹ ㅁㅗㅣ’로 가로로 풀어 썼다. 붓으로 쓴 이 사전 원고는 240자의 원고지 153쪽의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. 현전하는 이 원고가 사전의 제1권으로 이 사전의 체재를 알 수 있는데, ‘알기’, ‘본문’, ‘찾기’, ‘자획 찾기’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. 즉 ‘ㄱ’부터 ‘걀죽’까지 기술되어 있는 이 사전 원고는 ‘알기’ 2쪽, 본문 153쪽, 찾기 50쪽, 자획 찾기 26쪽으로 이루어져 있다. 이 사전 원고를 제외한 『말모이』의 나머지 부분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.
이 사전 원고는 ‘ㄱ’~‘걀죽’밖에 없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자료이다. 우선 한글 표기사나 한국어 어휘 변천사를 이해하는 데에 부분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, 이규영의 비망록 『온갖것』(1911~1913)에 적혀 있는 품사 분류와 같이 어미와 조사를 독립된 품사로 설정하였으므로 한국어 문법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도 사용할 수 있다. 그리고 한국어 사전의 편찬 역사를 기술할 때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이다.
첩해신어(捷解新語)
『첩해신어(捷解新語)』는 1618년(광해군 10)에 강우성(康遇聖, 1581~?)이 편찬하여 1676년(숙종 2)에 사역원(司譯院)에서 10권 10책의 활자본으로 간행한 일본어 학습용 교재다. 강우성은 1592년 12살의 나이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 가 10년만에 돌아왔는데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에 배운 일본의 풍습과 일본어를 귀국 후 정리하여 이 책을 지은 것이다.
체재는 일본문자를 대자로 쓰고 그 오른쪽에 한글로 발음을 적어 놓았는데 각 구절로 나뉜 일본문자의 아래에 쌍행으로 우리말 풀이를 한글로 적고 있다. 대부분이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다.
국립한글박물관에 『첩해신어』 권4~7, 권8~10이 소장되어 있는데, 권말제면에 ‘康熙三十八年己卯孟春濟州譯學朴世英監?開刊’라고 적혀 있어 1699년(숙종 25)에 제주 박세영(朴世英, ?~?)이 개간하였음을 알 수 있다. 판식으로 보아 원간본을 가지고 1699년에 중간한 것으로 추정된다.
17세기 국어와 일본어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. 특히 내용이 문답식의 대화체로 되어 있어 당시의 구어를 반영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.
위 설명은 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습니다.